차미새/연재칼럼: 심리학의 눈으로 경제학을 말하다

1)경제학의 태동: 보이지 않는 손은 정말 차가운가?

해강海江 2024. 8. 11. 19:15

지금 이 시간에도 열심히 차트를 들여다고보고, 신문, 뉴스의 경제란을 기웃거리는 우리의 목표는 무엇인가?
물어 뭐하겠는가. 성공적인 투자겠지.

그렇다면 성공적인 투자란 무엇을 목표로 하는가? 돈을 버는 것을 목표로 한다.
돈을 버는 목표는 무엇인가? 
여기서부터는 사람마다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작은 돈이라면, 
생업에 종사하며, 나의 삶을 조금이라도 윤택하기 위해
소액 전업으로, 생활비를 벌기 위해

보다 큰 돈이라면,
차를 사려고, 집을 사려고, 삶을 바꾸려고, 또는 (정말 싫어하는 말이지만)경제적 자유를 얻으려고 투자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성공적인 투자를 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될까?

뭘 어떻게 되겠어, 행복해지것지.... 적어도 불행 또는 불안감에서 벗어나 편안함을 느끼게 될 확률이 높을 것이다.

즉, 경제적 풍요는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행복하게 만들어주진 않아도,
적어도 불행감, 불안감에서는 상당부분 벗어나게 해 준다.

그리고, 국가적인 단위에서 이를 고민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애덤 스미스(1723~1790)이다.

아마도 이 분에 대해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일 테지만,
실제로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표현은 단 한번밖에 나오지 않으며,
애덤 스미스의 모든 저작물을 뒤져봐도 단 세 번 나오고, 문맥상의 의미마저 각각 다르다.

 

실제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을 시장원리, 혹은 가격과 직접적으로 결부시킨 것은,

신고전학파의 창시자이자 케인즈(케인즈학파의 케인즈 맞다)의 스승인 알프래드 마셜(1842~1924)로써,

사실상 학문적으로 경제학이 정립된 시기가 20세기(1900년대)임을 감안했을 때,

우린 대체 어떤 시대적 흐름 속에서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이렇게 왜곡되어 해석되고,
특히나 사기꾼들이 잘 사용하는 개념이 되었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 아니, 너 차(트에)미(친)새(x)라며 차트보고 분석이랑 픽이나 내놓을 것이지 이딴거 알아서 뭐함?

???: 맞어. 심지어 너 심리학 석사지 경제학은 1도 모르는 놈이잖아. 빈수레가 요란하다고 사실 사기꾼은 너 아니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단순 단타라 해도,
스윙 매매라 해도,
장기 투자라 해도

모든 트레이딩은 '경제의 흐름'속에서 '내 돈이 될 만한 기회'를 잡는 것이다. (반박시 내말 맞음 ㅇㅅㅇ)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사 속에서의 경제흐름을 알고, 그 흐름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고민하려 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특히나 우리가 보는 '트레이더 유튜브'는 더더욱.

자왈(子曰)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라,

투자는 미래를 예측하고 대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부富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인데(운빨X망겜 제외)
과거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현재의 흐름을 보면 미래를 어떻게 제대로 예측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도덕철학자였던 애덤 스미스가 경제학의 아버지가 된 시대부터 설명을 시작할 테니,

잘 따라오라구!!

 

애덤 스미스가 도덕감정론, 국부학 등의 저서를 집필하던 시대인 18세기,

서양은 식민지주의, 제국주의가 극에 달했있었고, 이 때의 경제사상은 '중상주의'였다.

중상주의란, 
국가가 경제 활동을 지원하며 이를 엄격히 통제한 정책으로, 식민지를 원료 공급지이자 상품 시장으로 삼아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은 제한하는 '국가민족주의'적인 경제사상이었다.

※이 때 당시는 경제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경제사상이라고 칭합니다.

 

 

그럼 이 당시의 애덤 스미스, 이 칼럼 1편의 주인공은 어떤 삶을 살고 있었는가?

1737년, 데이비드 흄의 친구였던 프랜시스 허치슨으로부터 윤리철학을 사사받고,
1751년~2년 논리학/도덕 철학 교수가 된 뒤,

1759년 (적어도 한국에선 아는 사람만 아는)[도덕감정론]을 발표하며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치게 된다.

 

이후 1764년부터 애덤 스미스는 교수직을 사임하고,

공작의 장남의 개인교사로 초빙되어, 여행을 시작한다.

...여행?
그렇다. 흔히들 생각하는 책상에 앉혀놓고 뭔가를 가르치는 그런 개인교사가 아니라,

무려 2년에 걸쳐 유럽을 여행하며,
여러 나라의 행정 조직을 시찰하고 중농주의(중상주의의 대립사상)사상가들과의 접촉을 통해 이들의 사상과 이론을 흡수했다.

그리고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 1776년에 책을 한 권 냈으니,

그것이 바로(이제야 한국인들이 아는) 
국부론이 되겠다.

 

 

국부론은 단순한 경제학 저서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국부론 전체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표현은 단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국부론의 원제는 《국부의 형성과 그 본질에 관한 연구(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인데,

국부론은 사실 아주 큰 의미를 두고 쓴 책도 아니다. 이는 국부론의 초안을 작성할 때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증명되는데,

'나는 요즘 시간을 때우려고 책을 한 권 쓰고 있다네'라며 쓴 책이 바로 국부론이다.

이는 케인스의 "어쩌면 나는 경제학에 소질이 있을지도 몰라."와 더불어 경제학 역사상 가장 겸손한 발언으로 손꼽힌다.

 

이 재수없는 천재는 국부론이라는 저서를 통해 여러가지 의견을 제시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이 내용일 것이다.

 "우리가 매일 식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그들의 고려 때문이다."
국부론 1편 2장 中

바로 이 부분에서 애덤 스미스는 향후 엄청난 오해를 받는데, 저 문장을 보다 쉽게 정리하면,

빵집 사장은 이기적인 놈이라서 빵을 만들어 파는 것이 아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grain)'빵을 만들며,
이는 빵집 사장의 이익(interest)로 연결된다.

즉, 애덤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Self-interest)을 경제 행위의 중요한 동력으로 보았다.

간혹 이기심을 selfishness(보편적인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욕할 때 사용되는)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명백한 오해로,

아주 극단적인 이기주의(문제를 야기하는 수준의)를 Selfishness로 이해하면 되며,

스펙트럼적 해석이 와닿지 않는다면, 나르시시스트(자기애성 성격장애 또는 그에 가까운)들의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하면 편한데,

에고이스트와 나르시시스트는 명백히 다르지만,
한국어로 번역할 때는 똑같이 이기주의자라고 번역되기 때문에 의미가 왜곡되기 쉬웠을 것이다.

이 칼럼에서는 명확한 구별을 위해,
Self-interest=이기심=이기주의로 사용하며,
Selfishness=극단적 이기심=나르시시즘적 이기주의로 사용할 것이다.

 

▲이렇게 사람을 조종하는 신같은 뭔가가 아니라고...!!



또한, 이러한 인간의 이기심은 사회 도덕적 한계 내에서 발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 이전의 저서인 [도덕감정론]에서 
인간의 나르시시즘적 이기심이 아닌 
타인과 '동감'하는 능력을 강조했다.


즉 나의 행복을 위해 남을 불행하게 해선 안된다는 기본적인 대전제를 제시하였던 것으로,

이러한 대전제 아래에서의 이기심 추구가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열쇠라 주장한 것이 바로 국부론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을 말할 때, 대부분은 이러한 대전제를 밝히지 않고 마치 
'도덕이고 나발이고 없이, 오로지 이윤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를 주장한 것처럼 이용하는데,

이 때문인지 애덤 스미스는 죽기전 묘비에 국부론의 저자가 아니라 도덕감정론의 저자로 적어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도덕 감정론의 첫 대목은 이러하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이라고 가정해도 인간의 본성에는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 요소가 분명히 존재한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바라보는 즐거움 이외에는 자신이 얻는 것이 없다고 해도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고 타인이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결국,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란

0)개인이 도덕적 한계 내에서 사익(私益)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1)누가 의도하거나 계획하지 않아도
2)자연스럽게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유익한 결과, 즉 공익(公益)을 가져오게 된다는
3)시장경제의 암묵적인 자율작동 원리를 의미한다.

이를 마치 시장경제 내에 공익 달성을 위해 사익을 조정해주는 신의 손이 존재한다, 라는 식으로 아전인수격 해석을 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인데,

 

 

예로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성선설적 도덕철학에서 기반한 이상적 경제사상을 지들 멋대로 왜곡하여 나르시시즘적 이기주의를 추구하는 도구로써 사용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았으면,

오죽 억울했으면 죽기 전까지 그런 부탁을 했을까 싶다.

1편에서는 이렇게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가 사후에까지 겪고 있는 억울한 오해를 풀어보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2편에서는, 어째서 애덤 스미스가 이러한 의견을 펼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세계 경제와 사회를 변화시켰는지 알아보고,
시간과 능력이 허락한다면 0편 유튜브 요약에서 다뤄진 주제를 드디어 건드려보고자 한다.

관련된 질문 및 반박, 의견제시 댓글은 진심으로 감사합니다.